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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거나 인문학 창작소/영화 속 인문학

영화 <밀양> (2007) -'용서'의 이기성에 대하여

by worker-uni 2022. 9.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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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

주인 공 신애는 남편의 불륜을 알고 있었음에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가 내연녀와 함께 교통사고로 사망한 후에도 그는 남편의 고향인 밀양으로 떠난다. 하지만 현실의 아픔을 숨기려는 그녀의 거짓되고 부풀려진 허황된 행동은 결국 아들의 유괴라는 참극으로 이어지고 만다. 그녀가 처음 찾아간 곳은 그녀를 귀찮게 쫓아더니던 남자, 김종찬. 하지만 이내 도움을 요청하지 못하고 돌아간다. 결국, 아들이 유괴되고 결국 살해당한 사실을 안 신애는 극심한 절망 속에 우울증과 경계심을 가지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막연히 찾아간 교회에서 오열을 하고 신을 믿게 된다. 신애는 기독교에 깊이 빠지며 신도들에게 자신이 마음의 평온을 찾았음을 고백하고 유괴범을 용서하러 교도소에 찾아간다. 그렇게 신애 외 종찬은 교도소에서 유괴범을 대면하는데, 신애의 상상과는 달리 너무나도 평온한 유괴범은 자신이 이미 "하나님께 용서를 받아 마음이 편안하다"라고 말한다. 그 말을 들은 이후 신애는 모든 상황을 부정하며 무기력증과 분노에 휩싸인다. 신에 대한 반항으로 그는 자살 기도를 하고, 도둑질을 하는 등의 행동을 한다. 결국 신애는 정신병원에 입원 치료를 받게 되고 이후 다시 동네로 돌아온다. 돌아온 동네 미용실에서 유괴범의 딸과 조우하게 되고 신애는 머리를 자르다 말고 집으로 돌아온다. 어느새 종찬이 그녀를 찾아와 그녀가 머리를 자를 수 있도록 거울을 들어주며 도와준다. 영화는 두 사람의 모습과 흩어지는 머리카락을 비추며 끝난다.  

뻔뻔한 유괴범

용서의 본질은 무엇인가?

밀양이라는 영화는 용서로 시작해 용서로 끝나는 영화이다. 바람 핀 남편의 고향에 굳이 돌아와 사는 신애의 모습도, 자신의 아들을 죽인 웅변학원 원장을 용서하기 위해 교도소를 찾아간 신애의 선택도, 자기 자신은 신에게 구원을 받고 이미 용서받았다며 웃는 원장도, 띠껍게 느껴진 신애의 충고를 받아들인 옷가게 주인도, 그리고 결국 종찬의 마음을 받아드리고 휫날리는 머리카락처럼 조금은 웃을 수 있게 된 신애까지 영화는 각기 다른 형태의 용서를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영화의 흐름은 관객들로 하여금 용서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하게 된다. 용서의 경중을 나눌 수 있는가, 용서의 대상은 누가 되어야 하는가, 그래서 결국 용서의 본질은 무엇이 되는가? 우리는 타인의 죄를 '대신' 사할 수 있는가? 신은 우리의 죄를 대신 사할 수 있는가? 

신은 그녀를 이 어둠에서 구할 수 있을까?

 

용서는 이기적인 행동이다

영화를 보며 나는 용서는 모순적이게도 굉장히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행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용서는 남의 죄를 포용하고 앙갚음을 푼다라는 번지르르한 겉모습을 가지고 있지만 그 원형을 쫓다 보면 결국 자기 자신의 심적 평온을 위해, 용서라는 신의 가치를 따르기 위해 (많은 종교의 경우 용서를 이상의 가치로 이야기하곤 한다), 혹은 용서를 하지 않고 갈등이 지속되는 상황이 불편해서, 더 나아가 더 큰 스케일의 용서의 경우 외교적, 경제적인 이유로 사람들은 용서를 한다. 영화에서도 신애가 원장을 용서하기로 한 것은 신의 선한 마음을 갑자기 닮았거나, 사건을 잊고 진실로 용서를 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냥 준이 죽고 세상 모두가 다 남의 편인 것 같은 상황을 탈피하기위한 자기 위안이자 탈피 도구였다고 생각한다. 원장도 마찬가지다. 그가 신의 구원과 용서를 논한건, 진짜 그가 신의 뜻을 알고, 해탈했기 때문에 그는 용서를 한 게 아니라 그냥 반인륜적인 범죄를 저지른 자신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렇다, 신애가 찾아간 그의 모습은 범죄자라고 보기 어려울 만큼 평온해 보였다)용서는 골치 아픈 상황을 벗어나고자 하는 자기중심적 행동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용서가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기 때문에 나쁜 행동이라고 비난해야하는가? 아니다. 용서의 주체가 용서를 결정하는 것은 자기중심적일 수 있지만 이에서 파생되는 뒤의 효과는 대체로 긍정적으로 나타난다. 용서는 단념혹은 무관심과는 다르게 시혜적인 성격을 띠고 관계를 지속할 가능성을 열어둔다. 또한 때로는, 용서를 한 주체의 진정한 의도와 별개로 용서를 받은 상대가 계속 살아갈 힘을 주기도 한다. 마치 장발장이 신부에게 용서 받아 새 삶을 살아가고, 옷가게 원장이 인테리어를 바꾼 것을 영화 후반부에 보여주며 신애 역시도 새로이 용서받고 새 삶을 살아가는 것을 암시하는 것처럼 말이다. 자기 위로의 용서를 한 신애가 자신을 옥죄는 마음의 짐을 덜고 흩어지는 머리카락처럼 훨훨 날아가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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