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을 뽑으라면 단연 김승옥 작가의 <무진기행>이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처음 접한 이후로 수십 번을 넘게 읽은 것 같다. 대사 하나하나 모두 다 외울 정도로 김승옥 작가의 소설의 분위기와 대사를 사랑한다. 박찬욱 감독의 작품 역시 복수는 나의 것을 시작으로 아가씨까지 모조리 챙겨봤을 정도로 참 좋아한다. 아무런 사전 조사 없이 헤어질 결심을 본지 얼마의 시간이 지나지 않았을 때부터 계속 머릿속에 무진기행의 대사들이 떠다녔다. 무진과 이포, 하인숙과 송서래, 부정할 수 없을 만큼 닮아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영화 속에서 반복해서 나오던 정훈희의 <안개>는 무진기행의 영화 버전인 <안개>의 삽입곡이라고 한다. 가장 좋아하는 작가와 가장 좋아하는 감독의 만남이라니! 잡설은 그만두고 몇 가지 생각들을 적어보겠다.
모호함으로 시작해 모호함으로 끝나는 작품
안개, 무진의 안개, 무진의 아침에 사람들이 만나는 안개,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 하는 무진의 안개, 그것이 무진의 명산물이 아닐 수 있을까!
- 무진기행 中
‘나 홀로 걸어가는 안개만이 자욱한 이 거리. 그 언젠가 다정했던 그대의 그림자 하나’
- 정훈희의 노래 안개 中
무진과 이포는 "안개"로 뒤덮인 동네이다. 안개는 시야를 흐릿하게 만들어 앞에 놓인 것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알 수 없게 한다. 작품들이 주 모티프를 <안개>로 잡고 있는 만큼 그들은 마치 작품과 독자/관객 사이에 안개를 둔 듯 사람들의 명확한 평가와 판단을 흐린다. 우리는 작품을 감상하며 선과 악, 옳고 그름을 이성적으로 판단하지 못한다. 사회 규범적으로 분명히 반하는 행동을 하는 주인공들을 보면서 우리는 그들을 비난하기는 커녕 오히려 공감하고 응원하게 된다. 마치 해준이 서래의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라는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듯 우리도 명확히 질문에 명확하게 대답하지 못한다. 안개와 같은 영화의 모호한 특성은 독자/관객으로 하여금 작품을 입체적으로 읽고, 둘러싼 환경보다 등장인물 자체에 몰입을 하게 도와주는 것 같다.
현실과 꿈 사이에서
두 작품의 주인공을 둘러 싸고 있는 환경은 굉장히 이분법 적이다. <무진기행> 속 "나"는 "서울"과 "무진", “유행가”와 “아리아”,“아내”와 “인숙이”, “책임”과 “무책임” 사이에서 맴돈다. <헤어질 결심>의 해준 역시 '아내'와 '서래', '부산'과 '이포'에서 끊임없이 갈등한다. 우리는 이즈음에서 전자는 현실과 책임을, 후자는 무책임 혹은 무의식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실에서 두 주인공은 모두 겉보기에는 성공한 사회인이지만 현실의 질서와 책임에 억눌려있다. 무진과 이포는 그들의 억눌린 욕망을 책임 없이 표출할 수 있는 창구이다. 마치 무진에서 벌건 대낮에 길가에서 교미를 하는 개들처럼 그들은 각각 서래와 인숙 곁에서 본능에 가까워질 수 있고, 무의식적인 욕망을 표출하며 현실 속의 무게를 한 짐 덜 수 있다.
하지만, <무진기행> 속 나는 결국 인숙에게 쓴 편지를 찢고 서울로 돌아간다. <헤어질 결심>의 서래는 해준의 곁을 떠나고 결국 해준은 현실로 돌아올 수 밖에 없다. 그들은 분명 서래와 인숙의 품에서 평온함을 느끼는데 결국 현실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무엇일까 고민하던 와중 나는 결국 이포와 무진에서의 기억은 결국 "꿈"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며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이 떠올랐다. <꿈의 해석>에서 프로이트는 꿈은 우리가 일상 속에서 충족하지 못한 육고를 충족하기 위해 일어나며 우리의 무의식이 반영되는 존재라고 설명했다. 그에 의하면 우리의 정신은 무의식적인 본능의 이드(id), 이드와 현실을 적절히 조화시키는 합리성의 자아 에고 (ego), 사회의 규범과 교육을 토대로 형성하여 우리의 '성본능'과 '공격 본능'을 억제하는 초자아 슈퍼에고(super-ego)로 이루어져 있다. 무진과 이포에서 주인공들이 하는 행동은 마치 꿈속에서 억눌린 본능이 표출되는 것과 유사하다. 사회적 규범과 역할을 저버리고 불륜을 저지르고 자신의 감정과 욕망에 솔직해진다. 하물며 무진기행에서 주인공이 무진의 안개는 마치 "수면제"같다고 생각하는 장면이나, 심각한 불면증을 앓는 해준이 서래의 옆에서는 "깊은 잠"에 빠져드는 장면은 다시금 "꿈"을 떠오르게 한다. 꿈은 황홀하지만 우리는 결국 꿈에서 금방 깨어날 수밖에 없다. 현실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잠에서 깨어나 다시 현실 속에 살듯이 책과 영화의 주인공도 다시 현실의 자기 본분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풀리지 않는 질문들
1. <무진기행>에서 서울로 돌아가며 주인공은 "부끄러움"을 느낀다. 부끄러운 감정을 느낀 이유가 무엇이었고 <헤어진 결심> 속 해준 역시 부끄러움을 느꼈을까?
2. 헤어진 결심에서 해준과 서래가 벽에 붙은 사건 기록을 보는 장면에서 제 4의 벽을 뚫고 관객을 정면을 응시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3.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을 이야기 함에 있어 모호함을 활용한 이용한 이유가 무엇일까?
본 포스트가 도움이 되었거나, 흥미로웠다면 좋아요와 댓글, 이웃 신청 부탁드립니다! :) 본 주제에 대해 함께 토론하고 논의하고 싶은 내용이 있다면 역시 댓글 부탁드립니다. 함께 이야기해봐요!
'아무거나 인문학 창작소 > 영화 속 인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화 <버드맨>: 인생은 롱테이크, 그리고 사랑 / 버드맨 줄거리, 결말, 분석/롱테이크 기법 (4) | 2023.02.02 |
---|---|
<소공녀>(Microhabitat,2018) 줄거리, 결말, 분석: 집이란 무엇일까? (2) | 2023.01.05 |
<바보들의 행진> (1975) 유신정권 아래 성역할에 대한 반기 그리고 좌절 (5) | 2022.10.09 |
영화 <밀양> (2007) -'용서'의 이기성에 대하여 (0) | 2022.09.19 |
한국 고전 영화-자유부인(1956) 줄거리와 잡다한 생각들, 그리고 질문들 (4) | 2022.09.16 |
댓글